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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포드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 포드의 창업자로, 자동차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포드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양산체제를 개발하여 대량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자동차는 더 이상 상류층의 고급품이 아니라 누구나 탈 수 있는 대중적인 상품이 되었습니다. 그의 명언 "자동차는 더 이상 상류층만을 위한 고급품이 아니다"는 그의 업적을 잘 대변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헨리 포드의 성장과 자동차 대중화 시대 개막, 위기의 포드와 박물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성장기와 포드 자동차 회사 설립

    성장기

    헨리 포드는 1863년 7월 30일 미국 미시건주 디트로이트 근처의 디어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디어번은 미개발된 시골 마을이었으며, 헨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포드도 농부였고, 헨리는 농부의 아들로서 자랐습니다. 헨리 포드는 농사보다 기계와 공학에 더 흥미를 느꼈습니다. 기계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며 기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토마스 에디슨이나 유명한 과학자인 패러데이처럼 발명가나 과학자들을 존경하며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응원해 주던 사람이 없어졌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헨리 포드는 학교를 그만두고 15세 때 가출하게 되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1890년에 디트로이트에서 에디슨 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 일하면서 자동차 제작에 열중했습니다. 그는 토마스 에디슨의 인정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에디슨은 자신의 전기 연구에 몰두하느라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는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1899년 포드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에디슨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포드 자동차 회사 설립

    1903년 포드는 석탄 딜러였던 알렉산더 맬컴슨과 함께 포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 '포드'의 시작이었습니다. 1903년 8월에는 포드가 첫 번째 모델 A를 출시했습니다. 이 작은 차량은 850달러에 판매되었고, 출시 후 약 1년 만에 약 2천 대 정도의 판매량을 기록했습다. 대중들이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생산 비용이 적게 들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헨리 포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13년에 컨베이어 벨트로 연결된 조립 라인을 도입하여 생산 과정을 단순화하고 효율화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양의 자동차를 짧은 시간에 생산할 수 있었고, 임금이 오르면서 가격도 낮아져 대중에게 구매 가능한 수준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는 자동차를 보유한 소수의 부유층이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도로를 채워가도록 하였으며, 미국에서 고속도로의 발전과 함께 자동차가 일상적인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 개막

    모델 T생산

    1908년 9월 27일, 포드는 모델T 생산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자동차는 사치품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헨리 포드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모델 T는 운전과 정비가 쉬운 자동차로서 현대 기술을 사용하여 최고의 성능과 재질을 갖추었습니다. 또한, 모델 T는 어지간한 봉급 생활자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사실, 모델 T의 가격은 당시 냉장고보다 더 저렴했습니다. 포드사에서는 앞으로 모델 T만 생산할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 대담한 선언에 경쟁업체 관계자들은 "포드가 망하려는 의도가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유층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다양한 선택지를 갖고 싶어 했기 때문에 포드의 선언은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포드와 함께 자동차 회사 '포드'를 설립한 알렉산더 맬컴슨도 포드의 목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맬컴슨은 포드에 있는 주식을 팔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포드는 맬컴슨이 우려했던 것처럼 망하지 않았습니다. 포드의 모델 T는 몇 달 후에 최초로 연간 1만 대 이상을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세는 계속되어 1911년에는 3만 대, 1913년에는 10만 대를 판매한 후 유럽과 호주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자동차 중 68대가 모델 T이었습니다. 포드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현대 대중 사회 영향 - 노동자 처우 개선

    19세기까지의 근대 사회가 소수의 귀족들을 위한 문명이었다면, 20세기 현대 사회는 신분의 차이가 없는 대중들의 사회입니다. 헨리 포드가 도입한 컨베이어 벨트에 기반한 대량생산 시스템은 자동차 산업뿐 아니라 다른 여러 산업으로 퍼져나가면서, 현대 사회의 특징을 형성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중산층을 만들어낸 사람으로, 노동자들에게 비례적으로 높은 급여를 지급했습니다. 1914년 그가 도입한 하루 8시간 근무 및 일당 5달러의 정책은 당시 철강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 12시간 노동으로 1달러를 받는 것과 비교하여 약 7.5배나 더 많은 급여를 제공했습니다. 포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시사만평에 따르면 모피를 입고 기사가 몰아주는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는 등, 비록 당시의 공장 노동자들이었지만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보였습니다. 또한, 포드는 주 5일 근무 40시간 근무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공장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정문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며 대기하기도 했으며, 일부는 문을 넘어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경비를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아일랜드계 백인으로서 흑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장애인들도 배려하여 동등한 급여를 제공하는 등 좋은 작업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심지어 맹인이나 팔이 없는 사람까지도 고용하는 등 폭넓은 사회적 포용을 실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가 창의성을 발휘하기보다는 기계에 예속된 부품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면서 노동 소외가 발생했습니다.

    위기의 포드와 박물관

    위기의 포드

    1922년에는 헨리 포드가 나치당에 정치자금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는 반유대주의자였고 '국제 유대인'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헨리 포드에게 감명을 받아 그의 초상화를 사무실에 걸고, 의미 있는 의미로 1938년에는 대십자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29년의 세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포드 회사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중들은 헨리 포드를 나치의 협력자로 비난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나타났습니다. 만약에 1943년 5월 25일에 에드셀 포드가 사망하고 헨리 포드는 81세인데도 다시 포드사의 회장직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성적인 성격 탓에 경영에 파탄을 가져와 회사의 경쟁력이 약화되었습니다.

    헨리 포드 박물관

    미시건주 디어본에 위치한 헨리 포드 박물관은 1929년 헨리 포드가 학생과 학자들을 위해 세운 역사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은 사실상 토머스 에디슨 기념관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1929년 전구 발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포드는 에디슨 학교를 설립했고, 1932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되었습니다. 1947년 헨리 포드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박물관의 이름이 헨리 포드 박물관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헨리 포드 아카데미, 벤슨 포드 연구센터, 그린필드 민속마을 체험장 등이 추가로 설립되어 현재의 복합문화단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미국의 자동차 박물관 중에서도 연간 160만 명에 달하는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헨리 포드와 관련된 물건뿐 아니라 경쟁사인 GM, 크라이슬러의 차량, 기차, 항공기 등을 전시하고 있어 운송수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도요타와 혼다 차량도 전시되어 있어 유가상승으로 인한 연비효율 향상과 차량의 경량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로 인해 헨리 포드 박물관은 포드의 과거와 미국 산업의 격동기를 탐구할 수 있는 글로벌 자동차 박물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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